NC소프트 회장 김택진이 살아온 삶, 명언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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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다. 정의로울 수 있는 용기와 전문가들의 비판에도 긍정적인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계획이나 설계가 아닌, 몰입적인 도전만이 결정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획이나 설계는 통찰 후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장기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건 강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도전적 몰입 상태의 지속이다. 열정이 이끄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에 정렬되어있는 충만한 동기가 진정한 동력이다. 꼭 해내겠다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택진 회장 어록 中

 

목차

     

    NC소프트 회장 김택진의 자산


    위의 어록을 남긴 NC소프트 회장 김택진의 재산은 얼마일까요. 김택진의 재산은 약 3조 원입니다. 말 그대로 게임 하나로 조만장자인데요. 리니지와 리니지 M의 누적 매출은 각 3조 7천억 3조 5천억 원이고 지적 재산권을 활용해 넷마블에서 출시한 <리니지 2>와 <리니지 2M>의 매출은 둘이 합쳐 약 2조 3천억 원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엔씨는 리니지 외 다른 게임들을 내놓기도 했지만 <리니지>로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세 발의 피도 안 될 정도입니다. 이렇게 리니지로만 10조 원에 가까운 매출액을 내놓은 김택진은 엔씨소프트 전체 주식의 12%를 갖고 있습니다.

    엔씨소프트의 시가총액이 약 17조 원이므로 김택진은 약 2조 원 가치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인데요. 또 엔씨소프트는 넷마블의 초대형 투자자이기도 합니다. 엔씨는 넷마블 주식의 6.9%를 소유하고 있는데요. 이는 약 7천억 원에 해당하는데 김택진이 엔씨소프트의 12% 지분을 갖고 있으니 그가 가진 넷마블의 개인 지분은 약 8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또 최근 게임 회사들의 반기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알려진 김택진의 연봉은 화제가 되었는데요. 2020년 상반기에만 급여 10억 1600만 원에 상여금 122억 7천600만 원을 더하면 그는 6개월간 132억 9200만 원을 번 것입니다.

     

    김택진이 소유한 부동산

     

    부동산

    김택진이 소유한 부동산 목록을 보면 입이 더 벌어집니다. 그는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한남더힐을 소유하고 있는데요. 국내 최고가 주택의 역사를 새로 썼던 초호화 빌라로 유명한 한남더힐의 70평 대 집을 김택진은 약 44억 원에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삼성동에 위치한 현대 아이파크를 두 채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2001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삼성동 아이파크를 구입했는데요. 50평 형과 60평 형을 각 10억 30억에 구입했는데 이곳의 현재 시세는 각 40억 원 이상입니다.

    김택진은 삼성동에 또 다른 단독 주택 한 채도 보유하고 있는데요. 청담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이 집의 면적은 240평이고 건축 면적 65평을 자랑하는데요. 노른자 땅 위에 지어진 만큼 이곳 주택 시세는 최소 130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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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C 다이노스 구단주

    그는 야구를 너무 좋아해 야구 구단까지 창단하는데요. 그는 2011년 NC 다이노스를 창단해 구단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비싼 선수들을 거침없이 사들이며 진정한 부를 보여주겠다는 한국판 만수르(?)와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창단한 지 9년 만인 2020년 첫 리그 우승을 맛보게 되죠.

    어떻게 그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시죠.

     

     

    NC소프트 회장, 김택진의 인생

    20년 전 대한민국 PC방에는 단 두 대의 게임만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였는데요. 리니지는 다른 게임과는 달리 조금 특별했습니다. 아이템을 사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가에 거래되는 아이템이 존재했고 게임에서 시작한 싸움이 현실 싸움으로 번질 정도로 수많은 린저씨들은 이 게임에 미쳐 있었다고 하죠.

     

     

    2000년대 초 PC방의 모습과 김택진의 모습

     

    출생 및 대학시절

    김택진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집안은 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꽤 잘 나가는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사업 부도를 맞으며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부모님의 힘든 시기를 본 김택진은 대견하게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부모님을 돕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중학생 시절 이미 고등 수학까지 마스터한 김택진은 당시 신흥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대일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요.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마스터한 김택진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쏠리게 되는데 바로 컴퓨터였습니다. 김택진은 컴퓨터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작동 원리를 터득하고 외국 서적들을 밤을 새며 독학으로 공부해 나가는데요. 컴퓨터에 대한 그의 욕심은 결국 그를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로 이끌고 이후 그는 컴퓨터의 모든 것을 배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컴퓨터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다

    당시 그는 수업이 없을 때 그 시절 컴퓨터 메카였던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하는데요. 이곳에서 김택진은 컴퓨터 소식과 최신 기종들을 접하며 컴퓨터와 거의 한몸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머릿속으로 컴퓨터의 작동 원리와 기계 구조를 그릴 수 있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당시 김택진의 나이는 겨우 21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하드웨어를 마스터하자 소프트웨어까지 눈을 돌리게 되고 프로그래밍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고 합니다.

     

    한글과 컴퓨터 창업주 이찬진과의 만남

    김택진은 프로그래밍을 배우고자 학교 컴퓨터 동아리에 가입하게 됩니다. 서울대 컴퓨터 동아리 SCSC는 그야말로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던 곳이었는데요. 김택진은 이곳에서 <한글과 컴퓨터>의 창업주 이찬진을 만나게 됩니다. 이찬진은 김택진의 나날이 늘어가는 프로그래밍 실력에 감탄했고 한국식 워드 프로세서에 공동 개발을 제안했는데요. 이렇게 이찬진과 김택진 그리고 다른 동아리 멤버 2명이 함께 개발한 제품이 바로 아래아 한글이었습니다.

    5.25인치 디스켓 3장으로 구성된 아래아 한글은 국내 컴퓨터 시장을 강타하게 되는데요. 아래아 한글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들은 한글과 컴퓨터라는 회사를 세우게 되고 김택진은 후속작을 준비하게 됩니다. 김택진이 내놓은 후속작은 바로 컴퓨터 입문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했던 타자 연습 프로그램 판매 타자 교사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개인용 PC에는 무조건 깔려 있어야 하는 프로그램이 되었고 김택진은 이 프로그램으로 업계에서 꽤 높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김택진은 사업가보다는 대학 교수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나와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됩니다.

     

     

    현대전자에 근무하던 시절의 김택진

     

    현대전자에 입사

    2년간의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박사 과정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현대전자에게 한 가지 달콤한 제안을 받게 됩니다. 현대전자는 김택진에게 병역 특례와 해외연수 보장을 하며 스카웃을 제안하는데요. 김택진은 이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미국에 위치한 현대전자 연구소로 날아가 1년 반 동안 인터넷 통신 기술을 갈고 닦게 됩니다.

     

    김택진은 이후 한국 현대전자 본사에 들어와 한국 최초의 검색 포털 아미넷을 개발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병역 특례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승진을 했고 고 정주영 회장마저 김택진이라는 이름을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거기다 현대전자 내부에서는 김택진이 개발한 아미넷을 두고 분열까지 나게 됩니다. 서로들 제품을 뺏으려 주도권 싸움이 일어났고 이 싸움은 1년이 넘도록 이어가게 되는데요. 총 개발 책임자였던 김택진은 이러한 상황에 염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발전 없는 싸움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차라리 자기가 회사를 세우는 게 낫겠다며 사표를 내게 됩니다. 이때가 1997년 그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엔씨소프트 내년 새 IP게임 여럿 준비, 김택진 '리니지 원툴' 탈피 각오

    [비즈니스포스트]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 사장이 신규 지식재산(IP) 게임 확보를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엔씨소프트는 내년으로 출시가 밀린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www.businesspost.co.kr

     

    퇴사 후 NC소프트를 창립, 리니지 출시

    이렇게 김택진은 회사를 나와 NC 소프트를 창립하게 됩니다. 창업 초기 엔씨소프트는 소규모 소프트웨어 회사에 불과했지만 꽤 준수한 실적을 보이며 순조로운 사업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리고 2년 차 김택진은 대한민국을 흔들 악마의 게임 리니지를 내놓게 됩니다.

    사실 리니지는 김택진이 직접 만든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김택진의 대학 후배였던 송재경은 다른 회사에서 리니지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IMF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되자 김택진은 송재경을 포함한 개발팀 전원을 NC에 입사시킨 후 리니지를 런칭한 것입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김택진은 초기에 리니지 CD를 가방에 가득 담아 동네 모든 PC방을 직접 뛰어다니며 홍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렇게 출시된 리니지는 서비스 시작 15개월 만에 100만 이용자를 달성하며 당시 스타크래프트 ONE TOP 체제였던 PC방은 점차 리니지 유저로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전국민이 리니지에 열광하다

    이렇게 리니지의 굳건한 수호자들인 최초의 린저씨들이 생겨나면서 리니지의 유저들은 게임 속 캐릭터에 자신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기 시작하며 시간과 돈을 쏟아붓기 시작하는데요.

    당시 희귀한 아이템들은 수백 수천만 원에 거래되면서 게임 내 <현질>이라는 문화를 최초로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최근 나오는 P2E 게임들의 시초가 리니지였던 것이죠.

    고생을 하면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되는 게임 구성은 전국 린저씨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리니지는 출시 3년 만에 500억 원대 매출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김택진은 이에 맞춰 회사의 리니지 외 모든 사업을 정리합니다. 오로지 리니지에만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의지를 선보인 건데요.


    회사가 망해 딱히 갈 곳이 없던 개발자들을 거두어 출시한 이 게임은 그야말로 김택진을 돈방석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도 <리니지>를 바탕으로 한 후속작 <리니지 2> <리니지 : 레드나이츠> 등을 히트시키며 NC는 공룡 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토대가 되었던 오리지널 리니지는 출시된 지 20년이 넘으면서 리니지를 했던 학생들은 이제 애 아빠가 되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 그 인기가 한풀 꺾이게 되죠.

     

    모바일 리니지, 리니지M을 출시하다

    하지만 2017년 김택진은 이런 느슨해진 긴장감의 린저씨들의 기강을 다시 한 번 바로 잡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니지의 모바일 버전 리니지 M의 출시였습니다. 리니지의 향수를 그리워했던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결과는 그야말로 초대박이었습니다. 출시 당일에만 107억 원 매출을 올리고 한 달간 누적 매출 2200억의 실적을 올리며 리니지는 모바일로 제대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렇게 김택진은 또 한 번 리니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김택진의 주옥같은 명언들

    1. 이 굴곡 많은 인생에서 성공이란 게 진짜 있나, 반대로 실패라는 게 진짜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고 그냥 갑니다. 성공을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2. 스트레스는 풀면 안 됩니다. 안고 가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9회 말 투아웃까지 갔는데 만루 상황에서 투수는 긴장하게 마련이에요. 감독이 타임을 불러 마운드에 올라가서 긴장 풀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말하면 반드시 지고, 도리어 심호흡을 함께 해주면 이긴다고 합니다. 긴장이 필요한 순간에는 긴장을 해야만 합니다.

     

    3. 결국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다.

    정의로울 수 있는 용기와 전문가들의 비판에도 긍정적인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계획이나 설계가 아닌, 몰입적인 도전만이 결정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계획이나 설계는 통찰 후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장기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건 강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도전적 몰입 상태의 지속이다. 열정이 이끄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에 정렬되어있는 충만한 동기가 진정한 동력이다. 꼭 해내겠다는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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