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왕조 아쇼카 대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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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통일국가, 마우리아 왕조(B.C 322~184) 위대한 왕, 아쇼카 대제 여러 소국가들의 정복과 흡수 통합이 이어지면서 인도아대륙은 마침내 몇 국가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 중 마지막까지 대치했던 비하르 남부지역의 마가다와 우드지방을 지배했던 코살라는 처절한 전쟁을 반복하던 끝에 마가다 왕국이 최후의 승자가 되죠.

 

목차

    시대적 배경

    빔비사라가 아들 아자타샤트루에 살해당하다

    마가다 왕국은 코살라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인도아대륙의 통일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꿈을 꾸게 됩니다. 마가다 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빔비사라(BC. 544-492)는 주변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통일 제국의 꿈을 키웁니다. 하지만 말년에 빔비사라는 그의 아들인 아자타샤트루에게 살해당하며 통일제국의 꿈을 달성치 못한채 숨지게 되죠.

     

    아버지를 살해한 아자타샤트루는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그 당시 태동한 불교화 자이나교를 보호하는 등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동시에 잡고자 합니다. 빔비사라와 아자타사트루 이후 마가다 왕국은 난다 왕조를 거쳐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게 됩니다.

     

    아쇼카 대제와 그의 능묘 및 그의 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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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마우리아 왕조 찬드라 굽타에 기회가 생기다

    그 사이 신흥강대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 356~323) 대왕이 인도의 서북부까지 진출해 여러 국가들을 정복합니다.(B.C 327)

    인도 완전정복의 야망이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이었지만 긴 원정의 피로감을 느낀 부하들의 만류로 페르시아로 회군을 결정합니다. 그가 인도정복의 야망을 접을 수 있었던 것은 애당초 페르시아 정복이 목표였기 때문이었고, 그에게 군 사기 저하를 감수하면서까지 원정을 지속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로의 회군과 함께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한 인도 대부분의 지역도 인도왕국들에게 통치하도록 맡기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순식간에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틈을 타 마가다 왕국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알렉산더가 인도 서북부에 남겨둔 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새로운 통일 왕국을 꿈꾸게 되죠.

     

    인도제국의 첫 번째 통일국가 마우리아 왕조 탄생

    알렉산더의 군대를 격파한 후 의기양양해진 찬드라 굽타는 힘을 키우며 기회를 엿보다 난다 왕조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난다 왕조마저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가다 왕국의 제왕으로 올라서면서 드디어 인도제국의 첫 번째 통일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탄생합니다. 찬드라 굽타의 뒤를 이은 빈두사라는 남부지방까지 세력을 확장시키며 타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지역을 지배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아쇼카 대제

    그 후 빈두사라의 아들 아쇼카 대제(B.C 304~232)는 마우리아 왕조를 넘 인도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이룬 왕으로 기록될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가장 이상적인 전륜성왕으로 불교의 포교에 힘씁니다. 그가 남긴 불교의 발자취는 스리랑카,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에도 남아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불교를 향한 그의 노력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전 세계적으로 불교가 차지하는 인지도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입니다.

     

    사실 아쇼카 대제는 불교로 귀의하기 전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왕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귀의 후 평화와 정치적 안정에 힘쓰게 됐으며, 여러 제국들과도 평화협약을 맺고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처럼 자비와 예우 등을 강조하며 가족간의 사랑이 사회전체로 퍼져 나가면 국가가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아쇼카 대제의 사망으로 국운이 기울다

    이러한 평화와 국가의 안정도 잠시, 위대한 아쇼카 대제가 사망하자 마우리아 왕조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게 되죠. 아쇼카 대제 사후 근근이 왕조를 이어가던 마우리아 왕조는 남서부 지역에서의 잦은 반란으로 군소 왕국에게 영토를 빼앗기며 급속히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마우리아 왕조는 마우리아 사령관인 푸샤미트라에게 마지막 왕이 살해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B.C 185)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 되면서 그 후 500년 가까이 인도는 분열과 혼돈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새겨 넣은 아쇼카 석주는 북인도 지역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석주의 기둥에 올려져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지폐, 여권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자상은 네 마리의 사자가 힘의 균형을 이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아쇼카 대제의 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30여년의 비교적 짧게 마감한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의 첫번째 통일제국으로 아쇼카 대제 하에 중앙집권적 통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왕조였습니다.

    또한 아쇼카 대제가 남긴 비폭력과 정치 그리고 국민, 제국의 통합은 그 후 인도의 어느 통치자도 흉내내지 못한 위대한 업적으로 남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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